쓸모 없는 일을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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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쓸모

         [명사]

           1. 쓸만한 가치

           2. 쓰이게 될 분야나 부분

 

 

 

다섯 살 때 친구를 따라 피아노 학원을 등록한 적이 있습니다. 갓 사귄 친구이긴 했어도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하는 친구라 걔가 피아노 학원에 있는 동안 저는 할 게 없었기 때문이었죠. 그렇게 시작한 거긴 했어도 꽤 오랫동안 했습니다. 친구 따라 시작한 게 피아니스트를 꿈꾸게 되었고, 하루에 5-6시간씩 연습해야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단 말에 새벽에 일어나 연습하고 학교를 갈 정도였으니깐요. 중2 때까지 총 10년을 배운 건데 고등학교 입시를 앞두고 관두게 되었습니다. 쓸모가 없기 때문이었죠. 결국 피아니스트가 될 건 아니었으니깐요.

 

 

 그런 건 배워서 뭐 하게? 

 

 

그렇게 무언가를 시작할 때 쓸모를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영어는 대학교 입학할 때 필요하니까, 중국어는 앞으로 뜰 언어라서, 스페인어는 배워봤자 얼마나 쓰겠어, 패스. 춤은 배워서 뭐해, 연예인 할 것도 아닌데? 패스. 그림 그거 돈은 많이 들고 돈은 못 번다는데, 패스. 그렇게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전에 쓸모를 먼저 따지게 된 거죠.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면 종종 사람들이 묻습니다. '그거 배워서 뭐하려고?'라고 말이죠. 마치 잘못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이런 류의 질문을 받으면 어떤 타당한 이유를 대야할 것만 같은 의무감을 느낍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죠. 그래서 배워서 뭘 할지 분명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면 시작조차 하지 않게 되었죠. 그리고 점점 새로운 걸 시도하는 횟수도, 관심사도, 행동반경도 모두 좁아져 버렸습니다.

 

 

미움받을 용기에서 인상적인 구절
<미움받을 용기>       - 기시미 이치로 -

 

 

너무 많이 언급되어 의미가 퇴색된 것처럼 느껴지는 책이지만 힘들 때마다 꺼내 보는 책입니다. 여기에 '키네시스(kinesis)적 인생과 에네르게이아(energeia)적 인생'에 대해 나오는데요. 목적지를 정해두고 이에 도달하는 인생이 키네시스적 인생이라면 이와 반대로 춤추는 인생은 에네르게이아적 인생이라고 합니다. 키네시스적 인생에는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어, 가능한 한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종점에 다다르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라 여기는 삶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여정은 불완전한 셈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요. 반면에 에네르게이아적 인생이란 지금 하고 있는 것 자체가 그대로 이루어진, 완전한 삶을 일컫는 말이라고 해요. 따라서 목적지에 도달했던 그렇지 못했던 목적지를 향하는 과정을 포함하여 모든 순간이 그 자체로 완성된 삶인 것이죠. 

 

 

 

돌아보면 저도 의식하진 않았지만 효율을 따지며 선택을 해왔던 것 같습니다. 과연 이게 앞으로 도움이 될 것인지, 제 시간과 돈을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그래서 얻은 결과는 얼마만큼의 가치를 가질 것인지 말이죠. 이처럼 쓸모를 염두에 두는 순간 쓸모를 달성하는 모든 여정은 가능한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쓸모가 있기 전까진 불완전하니깐요. 당연히 그 과정을 즐기기도 어렵겠죠. 그치만 생각해보세요. 이게 내 삶에 도움을 줄지 안 줄지 따지지 않고 침대에 누워 넷플릭스나 볼 때 아주 행복하지 않나요?

 

그래서 남은 2020년은 쓸모가 없는 일들로 채워볼까 합니다. 당장 스페인 여행 갈 일은 없지만 스페인어도 배워보고, 그동안 손재주가 없단 핑계로 멀리 한 도예도요. 브런치에다 글을 쓴 것도 뭘 염두에 두고 시작한 일은 아니니까 이미 첫 발은 디딘 셈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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